감독의 필모그래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감독보다도 관객이다. 나는 봉준호 감독의 <옥자>(2017)를 보면서 그의 전작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특정 감독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되는 상징과 이미지를 발견하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지만, 이번만큼은 사정이 다르다. <옥자>를 보고 극장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허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비어있음. 결핍이기도 하고 구멍이기도 한 마음. 영화가 워낙 만족스럽지 못했던 터라, 나는 이런 생각마저 들게 되었다. 만약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아니었다면 나는 <옥자>를 어떻게 보았을까? 모든 영화는 하나의 완결된 세계이다. 영화의 빈틈을 감독의 다른 영화로 채우는 것은 세계를 간섭하는 일이 되고 만다. 그러니 나는 <옥자>를 쓰면서 감독의 어떠한 전작도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옥자>의 빈틈을 해명하기 위한 시도이다. 나는 굳이 결손을 채우려 하지 않고, 단지 구멍이 저기 있다고 말할 것이다.
미자라는 주체의 문제
영화 <옥자>가 내재하는 단 하나의 문장은 ‘옥자를 구하라!’이다. 구출은 행위이고 옥자는 행위의 대상이다. 행위의 주체는 물론 미자(안서현)가 된다. 미자와 대결하는 상대, 즉 ‘누구로부터 구할 것인가’하는 자리에는 미란도 코퍼레이션(이하 미란도)이 와야 한다. 다시 말해 <옥자>는 ‘미자가 미란도로부터 옥자를 구한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첫째, 왜 옥자를 구해야 하는가?(이유) 둘째, 어떻게 옥자를 구할 것인가?(수단)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옥자와 미자의 정서적 유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수단은?
없다.
<옥자>에서 미자가 옥자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금돼지는 한 번도 수단으로 제시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우연의 작용에 가깝다). 산에서 내려온 미자는 무작정 달릴 뿐이다. 초인적인 힘으로 트럭에 매달려 있다가 옥자와 달아나기도 하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그만한 동물을 빼내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ALF나 미란도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수행하는 동안에도 미자는 그들에게 끌려다닐 뿐이다. 옥자 구출의 유일한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미자는 스스로 아무것도 선택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능동성을 거세당한 소녀. 수단의 부재에 따른 무기력감. 미자가 미국으로 건너가기로 한 시점부터 영화가 급격하게 지난해지는 이유는, 행위의 주체인 미자가 철저하게 객체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단지 내용상의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미자를 소외시키는 주범은 감독이다. 단적인 예로 분량을 들 수 있다. 미자는 미국에서 단 세 개의 신scene(분장실, 콘테스트, 공장)에만 등장한다. 영화로부터 소외당한 인물에게 관객이 공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미자를 따라 미국으로 왔던 것인데, 거리도 확 멀어져 버리니 몰입이 떨어질 수밖에.
미자는 의도적으로 관객과 거리를 두는 인물이다. <옥자>에서는 미자에 관한 어떠한 배경설명이나 사연도 제시되지 않으며, 그 자신 또한 관객에게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다. 물론, 의도야 있겠지만, 미자는 단순히 옥자에게 귀속된 인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주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주체에게 호응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미자는 항상 화를 내며 옥자 내놔! 옥자 내놔! 라고만 외칠 뿐, 다른 인물들과 그 외의 말은 주고받지 않는다. 인간적인 고뇌나 성찰도 부재하다. 전형적인 인물로 가득한 <옥자>라는 세계 안에서, 미자는 가장 평면적인 인물로 보일 정도이다. 주인공인데! 미자가 조금이라도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그가 ‘소녀’라는 점이다. 나는 감독이 소녀의 이미지만을 차용하기 위해 미자를 <옥자>에 끌어들인 것은 아닐까 의심할 수밖에 없다. 미자는 누구인가? 유일한 욕망 외에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소녀. 끝끝내 관객은 미자가 ‘산골소녀’라는 것 말고는 무엇도 알지 못한다. 영화의 결말, 산골로 돌아온 미자가 옥자에게 귀를 기울이며 정면을 응시했을 때, 나는 그 눈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몰라 공허했다. 한 번도 마음을 나눈 적 없는 소녀의 응시. 나는 거기서 무엇을 느껴야 했던 걸까?
옥자라는 딜레마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와서 외쳐보자. 옥자를 구하라!
여기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은 간편하다. 옥자가 미자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옥자와 미자의 정서적 유대감은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동인이다. 둘 사이에 상당한 애착이 있어야만 옥자를 구하는 일이 당위를 얻는다. 옥자가 옥자인 이유는 정서적 능력 덕분이며 이는 그의 상당한 지능에서 비롯된다. 옥자의 특별함. 이것이야말로 <옥자>에서 가장 이상한 부분이다.
옥자와 미자의 애착은 서사를 이끌어가는 유일한 단서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초반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자칫 영화는 옥자의 특별함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영화 초반에 옥자가 도구와 지형을 활용해 미자를 구해내는 장면은, 그가 상당히 똑똑하며 독자적인 판단과 행동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산골을 벗어난 옥자는 (미자와 마찬가지로)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무기력하기만 하다. 단 한 번도 지능이라는 것을 활용하지 못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옥자가 단지 식용으로 개발된 유전자변형 슈퍼돼지일 뿐임을 확인하는 것만 같다. 옥자가 옥자여야만 구출에 지지와 동의를 얻을 텐데도 옥자를 옥자이게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미자만이 꾸준하게 옥자 내놔! 하고 외로이 외칠 뿐이다. 미자가 전력으로 달릴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 역시 옥자를 구해야 한다고 여겼지만, 나중에는 왜 옥자를 구해야 하는지 공감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묻고 싶었다. 왜 옥자‘만’ 구해야 하는데?
나는 나의 질문이 의도된 것으로 생각한다. 만약 옥자의 특별함을 계속 강조했더라면 <옥자>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이는 분명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제한하는 일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감독은 옥자를 특별하게 만들되 특별함을 부각하지 않는 방식으로 연출할 수밖에 없었다. 옥자는 옥자인 동시에 수많은 슈퍼돼지 중 하나여야 한다(반대로 슈퍼돼지들은 잠재적 옥자여야만 한다). 이것이 옥자의 딜레마이다. <옥자>는 옥자를 간절히 구하고 싶게 만드는 대신, 옥자를 대표로 발탁해 수난사를 그려 보인다. 과연 그 시도가 성공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극적 재미를 일부 포기한 것이지만 옥자를 통해 사회문제를 효과적으로 제기했다고도 보기 어렵다. <옥자>는 어느 것에도 확실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동물의 사육과 도축에 관련된 쟁점들을 두루뭉술하게 스쳐 갈 뿐이다. 영화는 단 한 가지 점에서만 확실한 성공을 거두었다. 관객에게 불쾌감을 심어준 것이다.
정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실험실 신이다. 옥자가 수컷과 교미를 당하는 장면은 분명하게 강간을 연상시킨다. 교미가 강간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옥자가 (무명의 가축이 아닌)옥자이기 때문이다. <옥자>는 내내 부정하고 외면해오던 옥자의 특별함을 단지 이 신에서만 ‘악의적으로’ 활용한다. 의도된 역겨움과 혐오. 교미와 샘플을 추출해 맛을 보는 행위에는 어떠한 당위도 없다. 단지 충격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철저하게 이미지를 관리해온 다국적기업에서 무려 10년이나 공들인 결과물을 선보이기 직전에, 옥자를 실험실로 데려가 수모를 겪게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미란도 같은 회사에서 조니 윌콕스(제이크 질렌할) 한 사람의 일탈로 그런 짓이 가능하리라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실험실 신은 감독의 악의적 연출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옥자에게 특별한 지능을 부여해놓고서, 특별한 지능이 활용되는 유일한 지점으로 실험을 설계한 것이다. 옥자의 특별함은 옥자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옥자에게 고통을(관객에겐 정신적 충격을) 주기 위해 고안된 장치이다.
옥자는 미자가 꾸는 꿈이었을까
영화의 마지막 신을 다시 꺼내보자. 한 번도 마음을 나눈 적 없는 소녀의 응시. 미자는 옥자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걸까? 두고두고 이 장면을 생각하다가 나는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하나 떠올렸다. 어쩌면 미자라는 인물을 ‘말이 되게’ 할 수도 있는 가정. 옥자를 미자가 꾸는 꿈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영화 전체를 뒤엎자는 것이 아니라 사실 옥자가 평범한 (슈퍼)돼지일 뿐이라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다. <옥자>에는 확실히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 옥자의 영특함─감을 따거나 물고기를 잡거나 미자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거나 굉장한 개인기를 선보이는 일들은 모두, 산골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미자와 단둘이 있을 때만 나타난다. 희봉(변희봉)이 함께 있을 때마저도 옥자는 개인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 초반, 미자와 옥자의 즐거운 일상은 영화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산골이라는 공간도 썩 이상한데, 그곳은 ‘나는 자연인이다’라기보다는 판타지의 공간처럼 보인다. 초반에 미자가 옥자와 함께 잠을 두 번 잔다는 점에도 주목해보자. 일단 산골을 벗어나기만 하면, 옥자는 평범한 (슈퍼)돼지가 되고 만다. 누구도 옥자가 얼마나 똑똑한지 모르고 옥자마저도 자기가 옥자라는 사실을 잊은 것 같다. 사실 이것이 ALF나 미란도의 직원들이 옥자에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사실이라면. <옥자>에서 미자 혼자 어린아이라는 점에도 주목하자. 영화의 마지막 신은 더더욱 꺼림칙하다. 옥자와 함께 산골로 돌아온 뒤, 키가 훌쩍 큰 미자. 마지막 신은 미자가 흰 남방을 입고 낙엽 위에서 잠을 자다 깨면서 시작된다. 산골에서의 세 번의 잠. 미자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이런 식으로 추론하면 조금 무서운 가정이 되고 만다. 미자는 누구에게도 옥자와의 특별한 일화들, 자신을 구해준 일마저도 발설하지 않는다. 미자의 함구. 철저하게 감춰진 내면. 짚이는 게 있지 않은가?
옥자를 미자가 꾸는 꿈이라 한다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조금 달리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미자에게 광주리를 건네준 옥자가 미자를 부른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본다. 옥자가 입을 달싹거리자 미자가 귀를 갖다 댄다. 아주 느리고 낮은 옥자의 웅얼거림. 그리고 미자의 응시. 그것은 혹시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2012)에서처럼)미자가 우리에게,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믿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었을까?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결코 알 수 없을 테니. 이러한 가정이 과한 생각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옥자>의 빈틈을 메울 수가 없는 것이다.
감독님, 부디 다음 영화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