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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의 첫 소설가, 최은영 《쇼코의 미소》

 

읽고 싶었다. 이름을 아는 작가가 아닌데도 읽고 싶어졌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은 줄도 모르면서. 단순히 젊은 작가의 장편을 읽고 싶었는지 모른다. 고백하자면, 나는 막연히 《쇼코의 미소》가 장편일 거로 생각했다. 그것은 거의 믿음에 가까운 생각이어서, 책을 주문할 때에도 표지와 제목 외에 어떤 정보도 확인하지 않았다. 막상 도착한 책을 펼쳐보았을 때, 한동안 나는 멍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무 순진했거나 충동적이었던 걸까. 사실 소설집인 것을 눈치챌만한 단서는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주문페이지에서 스크롤만 내리면 됐을 일이고, 김금희 작가의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와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구성으로 출간된 책이라는 점은 결정적인 힌트였다. 왜 서점에 가서도 이 책만은 한 번도 떠들어보지 않았던 걸까.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잘못 도착한 소포를 풀어보는 심정으로 《쇼코의 미소》를 읽기 시작했다.

 

표제작 〈쇼코의 미소〉를 읽고서, 나는 또 한 번 멍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거의 울컥했다. 소설의 주인공인 내(소유)가 할아버지를 배웅하는 장면에서, 우산을 펴려고 낑낑대다가 아씨, 우산이 펴지질 않잖아, 할 때 나는 정말 거의 울컥했다. ‘모르는 작가’였던 최은영을 기억하는 데에는 〈쇼코의 미소〉 한 작품으로 충분했다. 그의 글은 문장이 남는 대신, 감정과 이야기가 남았다. 하나의 장면이, 분위기가, 인상이 남았다. 때로는 소설 속의 습도가 그대로 전해왔다. 최은영은 마음을 건드리는 글을 쓰는구나 싶었다. 그것은 근래 읽었던 어느 작가와도 다른 느낌이었다.

 

《쇼코의 미소》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말하라면, 나는 당연히 〈쇼코의 미소〉와 〈한지와 영주〉를 들 것이다. 이 두 작품에서 작가는 주로 개인의 내면에 주목한다. 개인의 복잡하고도 모순되는, 이기적이면서 연약한, 끊임없이 세계와 부딪히며 상처 주고 상처 입는 마음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일인칭 화자인 ‘나’이다. 소유이기도 하고 영주이기도 한 나. 누군가의 딸인 나. 〈쇼코의 미소〉와 〈한지와 영주〉에서 내가 나인 것은 뒤집을 수 없는 전제와도 같다. 사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 두 작품이 아니라 ‘그 이후’에 발표된 다섯 작품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오직 두 사람》의 작가의 말에서 2014년에 진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참혹한 비극과 관련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쇼코의 미소》에 수록된 작품들을 발표 시기에 따라 나열해보면 아래와 같다.

 

2013 겨울 〈쇼코의 미소〉
2014 여름 〈한지와 영주〉
2014 가을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2014 겨울 〈미카엘라〉
2015 가을 〈먼 곳에서 온 노래〉
2015 겨울 〈비밀〉
2016 5월 〈씬짜오, 씬짜오〉

 

소설가는 자신이 속한 세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부터 〈신짜오, 신짜오〉에 이르는 다섯 개의 단편은 소설가 최은영이 ‘그 이후’를 견뎌내는 ‘태도’처럼 읽힌다. 〈미카엘라〉와 〈비밀〉에서는 세월호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다루면서도 함부로 위로를 건네지 않고, 그 이후를 어떻게 살아내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견디고 버티는 시간을 서술한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와 〈씬짜오, 씬짜오〉에서는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비극에 눈길을 돌려, 그 이후를 살아온 인물을 소설에 담는다. 나는 작가가 개인에 머물던 시야와 이야기를 현실문제로 확장했다고 해서 그것을 성장으로 읽고 싶진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제된 것, 피치 못할 것, 그날 이후 우리가 짊어져야만 하는 어떤 것에 가깝다. 김영하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2013년 등단한 최은영은 하필 그 시기에 소설가로서 첫발을 뗀 것이다. 어쩌면 그는 세월호 이후의 첫 소설가인지 모른다.

 

분명한 변화들. 작가는 그 이후에 화자인 나, 즉 ‘딸’을 잃었다. 특히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미카엘라〉, 〈비밀〉에서는 의도적으로 딸의 부재를 드러낸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는 인물을 이인칭(엄마, 이모)으로만 부를 뿐, 아마도 딸일 화자는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이 작품에는 ‘내’가 없다. 〈비밀〉은 어떤 편지도 배달되지 않는다는 ‘그곳’으로 가버린 손녀딸 지민의 부재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미카엘라〉는 좀 더 이상하다. 여자와 엄마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응당 그들의 관계가 엄마와 딸일 것으로 예견되지만, 후반에 가서 작가는 인물들을 마구 뒤섞으며 이렇게 써놓는다.

 

여자는 노인을 부축하고 미카엘라의 엄마와 할머니를 찾아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리고 이이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너무 멀고 힘들지 않기를 바랐다. 다친 마음을 마음껏 짓밟고도 태연한 이 세상에서 그이들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를 원했다.

 

여자, 노인, 미카엘라, 엄마, 할머니. 광장에 모인 익명의 여성(들). 광장에 부재한 것은 유일하게 호명할 수 있는 미카엘라이다. 작가는 여자아이들의 흔한 세례명인 그 이름을 그날 배에 타고 있었던 모든 딸의 이름으로 확장한다. 내 딸을 잊지 마세요. 잊음 안 돼요.” 하는 그 외침. 최은영은 ‘이이들’의 말을 옮겨 적고 그들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생생하게 지속되는 현실 속에서, 소설가는 얼마나 무기력한가.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 이후의 세계는 더 나아질 수도, 괜찮아질 수도 없다. 그저 남은 이들끼리 서로를 속이거나(〈비밀〉), 광장에 모이거나(〈미카엘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재회하거나(〈씬짜오, 씬짜오〉), 불가능한 상황을 빌려서라도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다(〈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우연하게도, 내가 《쇼코의 미소》에서 마지막으로 읽은 작품은 〈먼 곳에서 온 노래〉이다. 나는 이 책을 중간쯤 읽고 나서야, 내가 비교적 최근에 최은영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올 초에 읽었던 ‘2016년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에 〈먼 곳에서 온 노래〉가 수록되어 있던 것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이름이었다. 나는 《쇼코의 미소》를 읽으면서 처음에는 〈먼 곳에서 온 노래〉를 건너뛰었다가, 다른 걸 다 지나고 나서도 마음이 동해 이 작품을 다시 한번 펼쳐보았다. 다른 작가의 글과 함께 있을 때는 딱히 두드러진 작품이 아니었는데, 최은영의 다른 단편들을 통과한 뒤에 읽으니 〈먼 곳에서 온 노래〉가 아주 새롭게 느껴졌다. 그것은 한없이

 

위안에 가까웠다.

 

최은영의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로 떠났거나 떠난 누군가의 반대편에 남는다. 〈한지와 영주〉에서 영주의 말처럼,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쇼코의 미소》에서 변하지 않는 사실은, 떠난 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세계에서, 〈먼 곳에서 온 노래〉는 다음날을 기약하는 유일한 작품이다. 우리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스물셋의 나와 스물여덟의 선배가 우리 안에 있는 가장 곱고 가장 뜨거운 마음을 담아 녹두꽃을 부르던 때로는. 노래는 끝났고, 우리에게는 선배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유일한 위안은, 적어도 우리가 외로이 홀로 남겨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희망까진 아니더라도, 세계의 폭력은 계속될지라도.